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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건 못참쥐 2025. 3. 8.

김규식(金奎植, 1881년[1] 1월 29일~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학자·종교인·교육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정치인·학자·시인·사회운동가·교육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종교인이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2] 노론 중신인 김상로, 김재로, 김치인, 김종수 등의 방계 후손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 강화회담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 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3] 1919년부터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임정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3년 외무부장으로 복귀하였다.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재창당을 주도하였고, 그 뒤 다시 임정을 떠났다가 1942년 선전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으며 주로 외교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으나,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때부터 적극적인 반탁론을 보류하고 先과도정부수립 後탁치논의를 주장하며 미소공위에도 협조하였다. 1946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1946년 남조선과 도입법의원 의장, 1947년 민족자주연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8년 남한 단독 총선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후 총선거 불반대 불참가 입장으로 바꾸고 민족자주연맹 당원들에게 총선거 출마를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하였다.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등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가명은 김성(金成), 김중문(金仲文), 김일민(金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 등이며, '변갑'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4]